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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만화수도' 고치를 가다]②‘만화 고시엔’을 아시나요?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일본의 대문호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 문장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 일본 북쪽의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을 방문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이 위대한 첫 문장을 빌려 헤럴드의 지식미디어 HOOC팀은 만화 강국 일본, 그 중에서도 만화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는 고치현을 방문했습니다. 1편이 ‘노잼’ 이었다는 선배의 지적에 이번 편은 유쾌하게 풀어봤습니다.>

이전 기사=①고치는 왜 만화왕국이 되었나?

[일본(고치)=손수용 기자]‘고시엔’(갑자원ㆍ甲子園ㆍこうしえん)

만화를 좋아하는 오타쿠(특정 분야의 취미에 심취한 사람)들이나 야구를 좋아하는 ‘야구덕후(야구+오타쿠)’들에겐 듣는 것 만으로도 가슴이 뛰는 세글자죠.
2012년 열린 일본전국고교야구선수권 고시엔. 사진=위키피디아

바로 일본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의 다른 이름입니다. ‘고시엔’은 원래 오사카에 위치한 일본 프로야구팀 한신 타이거즈의 경기장 이름인데요. 하지만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이 바로 이 ‘고시엔’ 구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고시엔’은 이 대회를 상징하는 말이 됐습니다.

‘고시엔’은 야구를 하는 일본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회이기도 합니다. 4000여개가 넘는 일본의 고교 야구팀 중 선택된 소수만이 참가할 수 있으며, 대회에서 두각을 보인 선수들은 프로진출에도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야구팬들에게도 고시엔은 최고의 이벤트입니다. 경기마다 매진 사례는 물론이고 TV 시청률도 30%를 웃돌죠. 이처럼 인기 있는 소재를 일본 만화가들이 그냥 지나칠 리 없겠죠. 때문에 ‘만화덕후(만화+오타쿠)’들에게도 친숙한 소재입니다.

‘H2’, ‘지옥의 갑자원’, ‘메이저 ’, ‘드림’, ‘루키즈’, ‘고앤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만화들이 고시엔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야구가 아닌 다른 종목의 ‘고시엔’이 있습니다. 그것도 일회성의 이벤트가 아닌, 25년이나 역사를 이어온 유서깊은 대회죠.

바로 ‘만화 고시엔’인데요.

일본에는 “오사카에 야구 고시엔이 있다면 일본 고치에는 만화 고시엔이 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화팬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대회입니다. 야구 고시엔과 마찬가지로 일본 내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 이 대회는, 그러나 야구공과 글러브가 아닌 펜과 붓이 겨루는 곳입니다. 
25회 만화 고시엔 포스터.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만화에 관심있는 일본 고등학생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데요. 매년 수백개의 일본 고교 팀들이 예선에 지원하지만 본선 무대를 밟는 것은 수십개 학교에 불과합니다.

만화 고시엔은 일본 만화업계 관계자들도 대거 참가합니다. 여기서 두각을 나타내는 미래의 만화가들을 스카우트하기 위해서죠.

그야말로 만화 왕국 일본의 명맥을 유지하는 큰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한국에는 다소 생소한 이 만화 고시엔을 HOOC은 지난 6일~7일 현지를 방문해 생생한 현장을 담아왔습니다. 
만화 고시엔이 열리는 고치현의 대회장. 이 때까지만 해도 이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전혀 몰랐다

▶플레이볼=지난 6일 도쿄 하네다 공항을 거쳐 고치현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국제공항이 없는 고치를 가기 위해서는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이동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말이 겹친 출장이라 기자는 예민했습니다. 한국 못지 않은 폭염 역시 저를 힘들게 했죠. 여기에 만화 고시엔이라는 생소한 아이템을 취재한다는 것 역시 부담스러웠죠. 이전까지 한국 언론에서 한번도 다루지 않았던 아이템이다보니 사전 조사를 하기도 어려웠고, 생각보다 현장의 열기가 높지 않을까봐 걱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만화 따위에 고시엔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이냐, 만화 좋아하는 일부 학생들의 경시대회 수준 아니냐”라는 선배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회가 열리는 고치현 고치시의 카르포트 문화플라자에 도착한 순간 눈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대회장 주변에 마련된 행사 부스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그 열기를 실감케 했다


일본 전국에서 모여든 대회 참가자들과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 대회 관계자들, 그리고 취재진들까지. 어림잡아도 수백명은 훌쩍 넘는 만화에 미친 이들이 대회장을 가득 메웠기 때문이죠. 
대회장을 가득 메운 참가자(노란옷)와 대회 관계자들.

특히 노란색 옷을 입은 참가 학생들은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대회 개막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올해 만화 고시엔에는 총 319개의 고등학교가 참가했는데요. 학교별로 3~5명의 팀을 이뤄 예선작을 제출해 1차 통과를 한 31개 학교, 총 150명만이 고치의 땅을 밟을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물론, 한국과 대만에서도 예선에 지원한 그야말로 국제적 만화 대회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참가 학생들의 표정에서는 각 도시와 나라를 대표한다는 비장함이 가득했습니다. 드디어 오전 10시. 각 학교 이름이 새겨진 피켓과 함께 학생들의 입장이 시작됐습니다. 전년도 우승팀의 우승기 반납이 진행됐고 고치현 지사가 직접 인사말을 전했습니다. 드디어 심사위원장의 개회선언과 함께 모두가 기다리던 주제가 발표됐습니다.

야구 고시엔으로 따지면 대진표가 발표된 셈인데요. 만화 고시엔에서는 주제를 제한된 시간 내에 3절지 종이에 표현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때문에 어떤 주제가 나오느냐에 따라 결승 진출 여부가 결정되죠.
인사말에 나선 고치현 지사.

그런데 말입니다. 이번 주제가 발표되는 순간 대회장에 있던 모든 이가 충격과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

기자도 당황스러웠습니다.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은 있었지만 기호의 정체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기자와 함께 탐험을 떠난 후배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후배는 어떻게 저걸 모를 수 있냐고 경멸에 찬 말투로 “선배, 16분 음표잖아요.”라고 기호의 정체를 알려줬습니다. 저는 후배의 지식 깊이에 감탄하며 수첩에 16분 음표라고 재빠르게 적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호의 정체는 ‘8분 음표’였습니다.)

음표를 주제로 만화를 그려야하는 학생들의 표정에도 숨길 수 없는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왔습니다. 술렁이던 장내는 경연 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울리자 조용해졌습니다. 
발표된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참가자들

마련된 부스로 돌아온 학생들은 만화를 그릴 수 있는 도구를 책상 위에 꺼내놓았습니다. 흡사 수술을 앞둔 의사가 수술도구를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것 같았는데요.

이내 대회장은 기합을 넣는 각 팀의 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손을 마주잡고 “할 수 있다”를 되뇌이는 학생들에서부터, 스크럼을 짜고 함성을 지르는 이들까지. 지켜보는 기자는 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목숨을 거나?라는 생각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합의판정, 그리고 패자부활전=대회 중에는 총 3번의 주제가 발표됩니다. 결승에 올라가는 팀을 뽑기 위해 첫 번째 주제를 발표하고 절반을 떨어뜨립니다. 그리고 떨어진 팀들을 대상으로 패자부활전을 진행하죠. 이후 최종전으로 결승을 진행해 대회의 우승팀이 선발되는 방식입니다. 오전 10시에 시작한 1차전의 마감시간은 오후 4시. 6시간 안에 주제를 한 장의 종이에 표현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요. 참가자들은 주제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를 한 후, 각자 맡은 부분을 나눠 만화를 완성해나갔습니다. 
이번 대회에는 한국의 학생들(전남예술고등학교)도 참가했다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참가자들의 손놀림은 더욱 분주해졌습니다. 흐르는 땀을 닦을 시간도 아깝다는 듯, 학생들은 붓과 펜에 몰입했는데요.

드디어 마감을 알리는 징이 울리고 모든 참가자들의 만화가 접수됐습니다. 이윽고 심사위원들의 심사가 시작됐죠. 학생들의 그림을 평가하는 심사위원들의 모습은 마치 TV 프로그램 진품명품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심사위원장이 단상에 오르자 참가자들의 긴장 역시 극을 향했습니다. 마치 야구에서 합의판정 결과를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참가자들의 시선은 심사위원장의 입술에 집중됐죠.

노력한만큼 모두가 결승에 가면 좋겠지만 이곳 일본도 역시 인생은 실전이었습니다.

총 31개 팀 중에 통과한 15개 팀의 이름이 순서대로 불렸습니다. 이름이 불린 참가자들은 ‘간바레!’, ‘요시!’, ‘스게!’ 익숙한 일본말을 외치며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끝내 이름이 불리지 않은 참가팀들은 아쉬움에 고갤 떨구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1차전의 주제 '8분음표'가 발표된 순간. 모두의 멘탈이 붕괴된 시점이었다

그러나 패배한 팀에게도 아직 역전을 바랄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었습니다. 바로 패자부활전인데요. 만화 고시엔은 떨어진 16팀들 가운데 패자부활전을 거쳐 5개 팀이 다시 결승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를 줬습니다. 경쟁이 목표이긴 하지만, 만화 꿈나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이 대회의 이유라는 점을 떠올리게 했죠.

‘18세 OO권.’

패자부활전의 주제였습니다. 얼마 전 일본에서 18세 청소년에게도 투표권이 주어지는 법이 통과가 됐는데 이를 바탕으로 출제된 문제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쉽지 않은 주제에 어떤 만화가 또 나오게 될까라는 기대와 함께 심오하고 아리송한 주제를 고집하는 주최 측의 의도가 무엇인지 당혹감이 밀려왔습니다.

공개된 주제를 바탕으로 다음날 오전까지 그림을 그리고 결승에 올라갈 팀을 선발한다고 합니다. 이름이 불리지 않은 16개 팀에게도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습니다.

③9회말 역전만루홈런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야구 선수 요기 베라의 명언입니다. 그의 말처럼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해보지 않고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튿날 아침, 패자부활전을 통해 올라갈 5팀의 명단이 발표됐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까스로 올라간 5팀 가운데 이변의 주인공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승에 진출한 20개 팀이 그려야할 주제는 ‘새로운 원소 발견’이었습니다. 이쯤 되니 과연 이 대회의 정체가 만화가를 뽑는 것인지 과학자, 아니 철학자를 뽑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회 참가자들은 예상했다는 듯 제한된 시간 내에 막힘없이 흰 백지에 놀랄만한 작품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최종적으로 대회의 우승자를 뽑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깜짝 놀랄만한 결과가 발표됐습니다.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온 아이치현의 토요아케 고교가 2등을 차지한 것입니다. 

준우승을 차지한 토요아케 고교의 만화. 잘 모르겠으니 가만히 있어야겠다.


누구도 예상 못했던 결과 발표에 장내는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께 뜨거운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당사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한참을 망설이다 단상에 올라갔고 터져나오는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을 계속해서 쏟아냈습니다. 감격에 겨워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기자도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그야말로 9회말 2사 만루에서 터져 나온 역전만루홈런이었습니다. 만화보다 더 만화 같았던 순간이었습니다. 
최종 우승을 차지한 이들과 2위를 차지한 기적의 학생들

우승은 이미 두 차례의 우승 경험이 있는 시즈오카현의 이토우 고교가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더 많은 주목을 얻은 것은 단연 패자부활전에서 올라와 2등을 차지한 토요아케 고교였습니다. 

이토우 고교의 우승작. 인간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표현했다는데...뭔가 심오하다



④고시엔의 흙

매해 여름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전국 야구선수권 대회, ‘고시엔’에는 유명한 전통 하나가 있습니다. 대회에서 패배한 팀은 고시엔 구장의 흙을 담아 가는 전통입니다. 어린 선수들은 그 흙을 보며 언제가 다시 돌아오겠다는 동기 부여를 하고 졸업을 앞둔 선수들은 자신이 흘린 소중한 땀과 눈물을 담아가는 것이죠.

고치에서 열린 만화 고시엔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참가했습니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의 학생들이 팀을 이뤄 출전한 학교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누군가는 다시 도전을 위해 고치에 올수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이번 대회가 마지막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틀간 고치 만화 고시엔을 취재하면서 부러웠던 것은 대회를 경쟁을 넘어 축제로서 즐길 여유가 있는 일본 학생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우승을 차지한 이토우 고교의 오나아이 리(18) 학생은 “3학년이라서 입시가 부담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같이 나온 학생들을 보며 만화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었고 느낀 점이 많았다”며 “다른 학교 학생들과의 소통을 통해 만화에 더욱 도전하고 싶어졌다”고 밝혔습니다.

대회는 순위를 두고 우승팀을 가려냈지만 참가한 학생들은 ‘만화’라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동료들이 만나는 축제의 장으로 대회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심사위원으로 참가한 만화가들 역시 우승한 작품과 탈락한 작품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오사카에 위치한 고시엔 구장과 달리 그곳은 흙냄새도, 땀 냄새도 풍기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꿈과 열정이 가득 담긴 이틀간의 고등학생들이 보여준 모습은 오사카의 야구 고시엔 못지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경쟁을 넘어선 축제의 한마당이었습니다.

참가한 학생들은 흙을 담아가는 대신 서로의 꿈과 열정을 가득 담아갈 수 있었습니다.

feelgood@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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