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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 누군가 꾹꾹 눌러쓴 손글씨가 내게 말 걸어왔다

[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밑줄도 있고 낙서도 있지만 훼손된 책이 아니다. 저마다 사연 품은 책이다.

“누군가가 사용한 뒤에 내버린 책이지만 흘러간 시간의 내음이 묻어나요. 헌책이 가지고 있는 시간이나 사연 때문에 느껴지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몇 손을 거쳐서 온 책에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이야기가 있고, 그래서 헌책만이 주는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세월의 더께를 고스란히 덮어쓴 채 살아가는 책들이 모인 곳. 이곳은 국내 마지막 남아있는 헌책방 골목, 부산 중구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 한 사람을 만나듯

“누군가 꼬깃꼬깃 접어놓은 흔적이 내게 말 걸어왔다”고 말하는 그는 낭독서점 詩(시)집 운영 3년 차 이민아(39) 시인이다. 이 시인은 “책에 남은 흔적이 내 삶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된다”고 했다.

보수동 책방골목에서 손때 묻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된다. 낙엽을 코팅한 책갈피를 전리품으로 얻기도 하고 부치지 못한 누군가의 연애편지를 읽는 짜릿한 순간도 있다. 이전 책 주인이 꾹꾹 눌러쓴 손글씨는 헌책이 전하는 안부다.

“한 장 한 장 넘겨 읽다 보면 밑줄, 접은 흔적, 메모가 있어요. 우연히 나와 함께 이 책을 나눠 가진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이 밑줄이 내 삶에는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 만나진 못했지만 그 사람과 내가 시간을 건너와서 대화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어요.”

책방골목에서 마주하는 책의 속표지에는 대개 책을 산 사람이 써넣은 이름이 적혀 있다. 어떤 책에는 날짜와 책방 이름까지 적어 놓은 경우도 있다. 책장의 행간에 수없이 그어진 밑줄로 보아 이 책의 소유자가 얼마나 열독(熱讀)을 했었는지를 헤아릴 수도 있다.

이 시인은 쇄가 서로 다른 강은교 시인의 시집 ‘풀잎’ 다섯 권을 펼쳐 보이며 “한 사람을 모시고 오듯이 책을 보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책의 표지에는 누군가 적어둔 젊은 날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다.

보수동 40년 헌책방, 대우서점

# 어느 시인의 꿈

보수동 책방골목은 6·25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었을 때 돈이 궁해진 피난민들이 책을 내다 팔기 시작하다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오래된 일본 서적도 많았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거주지였던 대신동에서 쏟아져 나온 책이었다. 패전 이후 몸만 빠져나가고 가져가지 못한 일본인들의 책이 책방골목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지금, 세월의 더께를 입은 이곳 책방골목은 부산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거듭났다. 그러나 책방 주인들의 사정은 다르다.

“대를 이어서 했던 이곳 책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누군가 30, 40년을 운영했던 헌책방의 끝이 월세를 못 낼 만큼이라고 하는 게 이 골목의 현실이더라는 거죠.”

대형 중고서점에 밀려 경영상 어려움에 처한 데다 최근 수년 사이 임대료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상인들의 폐점이 늘어났다. 많았을 땐 70개가 넘었다는 이곳 골목길 책방은 이제 50곳이 채 되지 않는다.

낭독서점 시집 주인장인 이민아 시인. 그는 “사라져가는 골목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고 했다.

2015년 8월, 36년 된 ‘정문서점’이 보수동을 생활을 마감하는 날, 이 시인은 이곳 골목길을 누비며 이전 책방 주인들이 내놓은 임대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인은 보름 만에 낭독서점 시집을 열었다. 여행, 골목, 사랑, 인생, 독서, 영화 등 여러 영역에 관한 시를 찾는 손님에게 시집을 소개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집전문서점이다.

“이곳 책방 주인들은 책을 구해주고 팔며 그 속에서 오가는 정을 좋아하는 분들이에요. 그래서 책방골목이 이대로 스러져가는 것을 더 지켜만 볼 수 없었어요.”


# 삶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곳

보수동 책방골목은 책만 파는 곳이 아니다.

40년된 헌책방을 운영하는 대우서점 김종훈(65) 대표는 책방에 20~40년 드나든 단골들로 구성된 ‘대우독서회’ 모임을 이끌고 있으며, 10만권 이상의 책들을 수집해 놓은 우리글방은 책과 삶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강연·공연·사진전 등을 열고 있다.

낭독서점 시집에는 1960년대 출간된 초판본과 절판된 시집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공유 서재가 있다. 보수동 책방 주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책 처방을 받을 수도 있고 책방 안쪽 깊은 골마루에서 주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비밀 책 콜렉션도 들여다볼 수 있다. 

낭독서점 시집에서는 타자기를 두들기며 시를 짓는 경험도 해볼 수 있다.

골목길 먼지 속에 책이 쌓이지 않게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는 경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책방 서적을 연간 수천만원 정도 구입하기로 했다. 해당 도서는 더 많은 사람들의 손길에 닿을 수 있게 지역도서관인 캠코열린도서관에 비치된다.

“깜깜한 어둠 속에 노랗게 물든 골목길, 그 불빛을 켜놓고 있는 책방이 많은 분들에게 빛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 시인은 “이곳은 삶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연결되는 곳”이라며 빙긋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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