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전북 완주 삼례읍에 사는 유한순 할머니와 전소순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1인칭 시점에서 재구성되었습니다. 두 할머님은 삼례읍 한글문해학교인 진달래 학교를 다니며 시를 쓰는 시인입니다.
▶나는 시를 쓰는 할매입니다 ② 유한순 할머니 기사보기
전소순 할머니는 딸이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학교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쓴 시 속에 살고 있다" 말했다. |
# 내 생일은 두 번 ② 전소순 할머니
나는 내가 하도 답답하고 남이 나를 몰라줄 때 시를 써요. 남을 위해서 쓰는 거 아니고. 왜냐면 하고 싶은 말을 여다 쓰고 나면, 속이 시원해.
그래서 내 생일은 두 번 있어요. 하나는 더운 여름 날이고, 다른 하나는 한글 배우러 학교 입학하는 날. 해도 안 뜰 때 나가가꼬 걸어서 학교에 가면 해가 훤히 떠. 그렇게 맨날 학교 다닌 지 이제 햇수로 팔 년이 되었어요.
나는 너무 없이 힘들게 살아가꼬,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어요. 언니들은 일정시대 때 일본 학교를 다녔고, 6.25 지나고 남동생들은 학교에 갔어. 나는 팔남매 중에 다섯 째인데, 중간에 태어나니까 암것도 배우질 못했지. 죽어라 일만 하고 살았어. 그때는 계집애들 글 배우면 친정에 편지 쓴다고 안 가르치던 때여.
6.25 전쟁이 끝나도 할머니들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
내 나이 스물네 살 먹을 적에 성 씨 하나 보고 중매로 시집을 왔어요. 근디 없어도 너무 없이 살았어. 경기도, 강원도, 포항, 여기저기 셋방살이로 얹혀서 이사를 얼마나 다녔나 몰라요. 계란장사, 쌀장사, 과일장사, 옷까시장사, 안 해본 장사가 없었어.
하루 벌고 하루 겨우 먹고 살다봉게 살아도 사는 것 같지가 않아서, 엄마야 아빠야 나 아무렇게 살고 싶다, 울면서 막 그랬어. 근디 아버지가 쌀 두 가마니 주면서 딱 그러시는 거야.
“시집을 잘 가든 못 가든, 남편 집에 들어가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살아야 하고, 죽어도 그 집 귀신 노릇을 해야지, 왔다리 갔다리 하는 꼴은 못 본다.”
지난 세월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울었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게 산 인생이여라, 서러워서 울었지.
전북 완주군 삼례읍에 위치한 진달래 학교(한글문예학교). 평균나이 70세 학생들이 학년별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았다. |
자다가도 일어나 시를 쓴다는 할머니들은 자신만의 시선을 글로 풀어내는 영락없는 시인이다. |
그러다 일흔셋 먹어서 친구 따라 진달래 학교에 갔어. 그때 우리 집 양반이 많이 아파서 간호한다고 뭔 정신이 있겠어. 배우고 죽어라 공부해도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잊어버리고 그랬어. 남편 먼저 저세상 떠나고서야 글을 제대로 배웠어.
학교에서 하라는 것은 다 했어. 근데 글씨가 예쁘게 안 써져요. 삐뚤빼뚤 써졌는디 그래도 지금은 조금 예쁘게도 써지고 띄어쓰기도 할 줄 알고. 그 재미로 이렇게 살아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시로 상도 받고 부담시럽지. 근데 상을 받으면 애들 상장 받을 때 좋아하듯이 신나. 기분이 좋은디 집에서 누가 칭찬할 사람 없응께 서운하지만.
나는 내가 쓴 시 속에 머물고 있어요. 내가 만나야 할 행복의 모습은 오래 전이지만, 그래도 하고픈 말 이렇게 쓰면 재밌어요. 혼자 무슨 낙으로 살겠어. 남 흉을 볼지도 모르고 내 자랑할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았는데 그래도 이렇게 뭘 써서 말이라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전소순 할머니가 쓴 시.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시로 쓰면 속이 시원하다"고 했다. |
낮이나 밤이나 글을 써야겠다, 하면 날밤 새더라도 끝장을 내야 해. 앉아서 책을 읽다가 조금 돌아댕기다 시를 쓰다가, 그게 너무 좋아. 괴로운 것이 없고. 그러다 잠이 안 오면 다시 책 보고. 책 보면 잠도 오더만.
젊을 때는 사는 걱정, 늙으니까 가는 걱정, 맨날 근심에 항상 주름살 피었는디, 시를 쓰니까 사람들이 내 나이로 안 봐요. 화장하고 그라믄 더 그래. 그렁께 내가 저기 다른 노인 양반들 보고, 우리 세상도 살아보게 학교 같이 댕기자, 하지. 그래서 늦었다고 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는 가봐. 고통스러운 내 인생, 이제는 안녕했어.
dsun@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