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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를 반납한 그는 약속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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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수 기자의 인스파이어]

“썰매 그만 타겠습니다”고 털어놨을 때, “아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감독만 노발대발했을 뿐이었다.

비인기 종목이라서, 성적이 좋지 않아서 그만두겠다는 게 아니었다. 홧김에 그만두겠다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7년을 함께한 썰매였다.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는 감독을 “다시 돌아오겠다”며 달랬다. 약속을 지킬 것이란 확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태래 전 스켈레톤 ‘국가대표’는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슬라이딩센터 ‘매니저’ 자격으로 트랙 위에 다시 섰다.

스스로 못다 이룬 꿈을 위해. 국가대표 후배를 위해. 

지난해 12월 준공된 슬라이딩센터 전경. 우리나라는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계기로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슬라이딩센터를 갖춘 나라가 됐다. 당초 30개월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신기술을 도입해 12개월 만에 완공했다.

#. “스켈레톤이 뭐에요?”

“스켈레톤에 뭐에요? 해골이에요?” 국가대표로 활동할 당시 자주 들었던 질문이었다. 이런 질문에 서운하지 않았냐는 말에 김 매니저는 “오히려 좋았어요. 제가 사람들에게 ‘이런 종목이 있다’는 걸 설명해줄 기회가 생긴 거니까”라고 답했다.

김 매니저는 17살 소년이었던 시절인 2007년부터 2013년까지 7년간 어깨에 태극 마크를 얹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힘들어도 이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그냥 태극기 하나였어요. ‘나는 진짜 우리나라 국가대표다’라는 자부심이 있잖아요.” 

스켈레톤 국가대표 시절의 김태래 매니저. 2002년 아버지를 따라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스켈레톤 경기를 처음 접했다. 그는 “머리를 앞에 두고 엄청난 속력으로 내려오는 선수들의 모습이 멋있었다”고 말했다.

호기심과 모험심이 강했던 시절,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햇빛에 달궈진 아스팔트 위를 뒤덮었다. 경기장이 없었기에 썰매에 롤러를 달아야만 했고 아이스링크장에선 썰매 대신 매트를 쥐고 뛰어야 했다. 비인기 종목의 현실이었다.

썰매를 내려놓기로 한 계기는 2012년 세계선수권대회였다. 우리나라에서 2번째로 참여한 수준 높은 대회. 여기서 출발점에서 그루브 날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한발만 더!”라는 욕심이 화를 불렀다.

몸의 부상보다 더 심각한 건 마음의 부상이었다.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대회였다. 유럽, 미주 등 선진국의 월등한 실력과 장비 그리고 지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에 자신이 없었다. 전에는 무시했던, 운동선수라 소개하면 “아~”하며 눈을 흘기는 사람들의 시선도 가슴에 박히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이였다. 7년간 짊어진 태극 마크를 내려놓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 스켈레톤 선수 출신 심판

김 매니저는 선수 시절 자신에 대해 “솔직히 선수로서는 실패한 케이스”라고 고백했다. 선수를 은퇴한 뒤로 썰매와 담을 쌓았다. 자신이 실패한 꿈을 향해 달려가는 다른 선수들의 모습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부모님에게 말하진 못했지만, 은퇴 후 꼴도 보기 싫었어요. TV에서 간혹 나오면 꺼버리고.”

그런데 자신의 인생에서 썰매를 빼니 남는 게 없었다고 회상했다. 썰매는 분신이자 제2의 김태래였다. 그는 “썰매만 보면 부모님, 친구들은 모두 나를 제일 먼저 떠올린다고 했다”며 “트랙을 떠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던 터였다. 고민 끝에 심판으로 진로를 틀었다. 

슬라이딩센터 트랙을 올라가는 김태래 매니저. 그는 “우리나라가 썰매 강국이 되기 위해선 뭘 해야되지?”라는 생각에 국제심판 자격증을 획득했다.

한국에서 봅슬레이ㆍ스켈레톤 국제심판이 단 한명도 없을 때, 김 매니저는 6개월간 벼락치기로 시험을 준비했다. 선수로 활동한 경력과 영어가 가능했던 게 주효했다. 합격 후 한국 최초의 봅슬레이ㆍ스켈레톤 국제심판으로 1년여 간 활동했다.

심판을 하면서도 스켈레톤 경기는 되도록 피했다. 그는 “선수이기 이전에 실패자였고 진로를 바꾸긴 했지만, 선수의 욕심과 미련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며 “한때 경쟁자들이었던 선수들의 경기에 심판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스켈레톤 보다는 봅슬레이 심판으로 많이했다”고 털어놨다.


#. “너밖에 없다”는 말에 평창으로

2014년 김 매니저는 미국으로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던 중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인 친구로 문자 한통을 받았다.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봅슬레이ㆍ스켈레톤 종목담당관을 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친구는 “무조건 지원해라, 너가 해야 한다. 너밖에 없다”고 설득했다.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못다 이룬 꿈이 있었다. 이 꿈을 조직위원회 일원으로, 안방에서 열리는 올림픽 무대를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가족들에게 얘기도 하지 않고 무작정 지원했어요.” 종목담당관 대신 우리나라에 최초로 설립된 슬라이딩센터를 맡기로 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아이스매이킹을 하고 있는 김태래 매니저. 트랙 조성은 100% 수작업으로 이뤄진다. 냉동플랜트가 콘크리트로 된 트랙을 얼리면, 해외ㆍ국내 아이스매이커들이 투입돼 소방용 분사기로 물을 뿌리고 얼음을 만들고 깎는다.

“모든 게 제로베이스였어요.” 슬라이딩센터 매니저는 경기장 운영을 비롯해 각종 예산과 인력을 모두 조정해야 했다. 트랙을 놓고 국가대표 선수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역할도 매니저의 몫이었다.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라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조직위원회 사람들도 설득시켜야 했다. 지난해 가을, 평년보다 높은 기온 탓에 트랙의 얼음이 녹아 해외 아이스매이커들과 ‘성애와의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썰매 종목은 특유의 개최국 프리미엄이 있다. 트랙을 많이 탈수록 유리하다. ‘올림픽 출전’이라는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준 후배들이 고마운 그는 “우리나라에 최적화된 트랙을 만들었다”고 자부했다. 

국가대표 시절, “경기장이 없었던 게 한”이었다던 김 매니저. 그는 슬라이딩센터에서 직접 썰매를 타보곤 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썰매를 처음 시작한 2007년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최고의 무대를 준비했으니까요. 그냥 즐겼으면 좋겠어요”

김 매니저가 은퇴하고서 자리를 채운 후배 윤성빈.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스켈레톤 국가대표 윤성빈, 김지수 선수는 오는 15일 김태래 전 국가대표가 치열하게 관리한 트랙에서 치열한 질주를 벌인다.




essential@heraldcorp.com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인스파이어ㆍINSPIRE>가 시작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극과 영감을 갈망하는 이들이라면, 인스파이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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