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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 편견을 두드리는 드러머, 여성 드럼라인 R.I.M
[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직장인, 아내, 엄마, 며느리, 딸…. 30대가 되면 여자에게 주어진 역할은 급격히 늘어난다.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이루고 싶은 꿈도 있지만, ‘책임’과 ‘의무’를 우선해야 하는 상황이 밀물처럼 밀려와서,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여자는 그 일들을 허겁지겁 해내고 버텨야 했다.

“그런데 드럼을 연주할 때만큼은 오로지 저 스스로가 제 삶의 주인공이라는 기분이 들어요.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 드럼은 제게 그걸 잊지 않게 만들어요.”

무게가 8~14kg에 달하는 드럼을 어깨에 메고 행렬에 맞춰 연주를 하는 림(R.I.M)의 팀원들은 직장인이자, 누군가의 아내이자, 한 아이의 엄마다. 그리고 이들은 한 목소리로 말한다. 드럼을 연주하는 시간은 ‘나를 찾는 시간’이라고.


국내에서 단 하나뿐인 여성 드럼라인 팀인 림을 지난 13일 서울 노원구의 한 연습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팀명인 림은 ‘리듬 인 마칭컬(Rhythm In Marchingcal)’의 약자다. ‘마칭컬’은 행진을 의미하는 ‘마칭(marching)’과 ‘뮤지컬(musical)’이라는 단어를 합친 신조어로, 이 단어에는 한 편의 뮤지컬처럼 행진하고 춤추며 연주를 하겠다는 팀원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 편견도, 두려움도 없이

이날 연습실에 들어서자 둔중한 베이스 드럼 소리가 심장을 울렸다. 강렬한 스네어 드럼 소리와 경쾌한 쿼드 드럼의 연타가 얹히자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팀원들은 리듬을 끊임없이 변화시키며 음악을 이끌어 가더니, 절도 있으면서 힘 있는 군무를 추기 시작했다.

“타악으로만 구성돼 있기 때문에 리듬적인 부분을 굉장히 다이나믹하게 만들어야 해요. 섬세한 편곡과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고요. 모든 드럼 파트가 딱 맞아서 연주될 때 느낌은 저희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들에게도 어떤 쾌감을 느끼게 하는 것 같아요. 악기 동선에 맞춰 퍼포먼스를 하다 보니 관객 분들이 신기하게 보시기도 하고.”

림에는 스네어 드럼, 쿼드 드럼, 베이스 드럼, 드럼 세트를 맡고 있는 10명의 팀원들이 있다. 팀원은 모두 여성이다. 팀에서 리더를 맡고 있는 윤소현 씨는 “아무래도 악기의 무게도 견뎌야 하고 리듬도 놓치지 않아야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 힘든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런데 힘이 있는 남성만 잘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고 말했다. 지난 2012년 결성된 림이 지금까지 ‘여성’ 드럼라인 팀으로 구성되고 있는 이유다.


“허리 힘을 기르려고 몸 중심을 잡아주는 ‘코어 운동’을 해요. 웬만한 체력을 키우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힘들거든요.”

‘어깨에 근육이 땅땅하게 잡혀 있다’라고 말하자, 소현 씨가 “저희가 힘이 좀 센 편이긴 해요”라며 웃으며 답했다.

 
# 우리가 만든 기회

음악계에도 결혼, 출산, 육아를 계기로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이 많은 편이다. 세 살배기 아이의 엄마인 팀원 임윤아 씨는 “육아를 담당하면서 음악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우울하기도 했고 악기를 연주하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다시 양손에 드럼 채를 쥐고 드럼을 두드릴 수 있었던 건, 림이 있었기 때문이다.

“팀에 다시 복귀하고 신나게 연주하다 보면 제가 잠시 엄마라는 걸 잊게 돼요. 육아 스트레스도 한 방에 다 사라지고요.”

그래서 이들에게 드럼은, 그리고 림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게 해주는 삶 그 자체다. 경력 단절 이후에 대한 두려움 없이 누구보다 멋지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존재니까. 



팀원 천혜원 씨는 “어느 날 갑자기 늘어난 책임 앞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는 이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며 “관객분들이 우리의 열정에 희망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이를 잘 낳고 다시 림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출산 이후에 팀에 복귀할 예정인 이혜준 씨는 “언니들이 길을 잘 터놨다”며 방긋 웃어 보였다. 림의 팀원들은 지난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1주일에 한 차례씩 만나 꾸준히 연습해왔다. 림 팀원들은 안무를 짜는 건 물론이고, 직접 작곡도 한다.

# 여성이기 전에, 사람

지난 3일, 서울 중구 경희궁에서 열린 드럼페스티벌에서 만난 림은 파워풀한 드럼 연주로 관객들에게 에너지를 불어 넣고 있었다. 관객들은 리드미컬한 드럼 사운드에 어깨를 들썩이며 손뼉을 쳤다.

그동안 림은 지역 곳곳에서 열리는 타악ㆍ드럼ㆍ마칭 페스티벌에서 70차례 이상 공연을 해왔다. 영화 ‘밀정’에도 드럼을 연주하는 배역으로 출연했다. 지난해에는 서울시 거리 예술단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여전히 외적인 부분에 대해 여성에게 좀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시선이 남아있다고 전했다.

팀원 김미연 씨는 “공연 섭외가 들어올 때 얼굴이 예쁘냐, 몸매가 좋냐, 여성이라는 점을 앞세워 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며 “그런데 저희는 정말 연주 실력으로 인정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드럼을 연주를 할 때만큼은 아내이기 전에, 엄마이기 전에 연주자, 작곡가, 퍼포머입니다.” 소현 씨가 덧붙였다.


# 꿈이 아닌 내 삶의 목표

팀원 김다은 씨는 생활에 아등바등하면서도 때로 초연하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 주며, 버거운 삶의 무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목표가 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진짜 이룰 꿈은 꿈이라고 하지 않고 목표라고 하잖아요. 저한테 드럼이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팀원들에게 드럼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을 에너지 넘치게 표현해주게 만드는 존재(정아름 씨)”이자, “팍팍한 삶을 잠시 잊고(임윤아 씨)” “내 몸의 일부처럼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할(이지혜 씨)” 악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모든 팀원들이 결혼, 출산, 육아 이후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팀을 오래오래 유지시키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이날 연습실에서는 ‘꺄르르’ 웃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dsun@heraldcorp.com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HOOC이 첫번째 프로젝트 <인스파이어ㆍINSPIRE>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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