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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녀와 야수 공주님은 작은 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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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1. 가볍게 둥실 뜬 구름 사이로 보이는 미국 플로리다주 월트디즈니월드의 푸른 하늘. 그 하늘 아래에는 거대한 마법사 모자 구조물과, 엉덩이를 씰룩이며 춤을 추는 미키와, 신이 나 펄쩍펄쩍 뛰는 꼬마 아이들이 있었다. 그리고 6년 전 당시 나는 월트디즈니월드의 테마파크 중 하나인 헐리우드 스튜디오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미녀와 야수>의 스탭이었다.

“별에게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현실이 될 거야, 운명의 신은 친절하거든.” 노래 가삿말은 디즈니에서 일하던 내내 쉼 없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반짝이는 노란 드레스를 입은 예쁜 공주님인 벨이 나타나선 “노래를 불러라”, “아름다운 세상이야” 소리쳤고 그럴 때마다 나는 저 구름 위에 올라가 행복에 젖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지난해 <미녀와 야수> 리메이크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이 더 반가웠던 건, ‘디즈니’라는 단어만 들어도 배시시 웃으며 지난 추억을 곱씹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었으니.



2. 그런데 나의 관심은 벨 역을 맡은 엠마 왓슨의 입으로 향했다. 2014년 유엔 여성(UN Women) 친선대사였던 왓슨이, ‘남성들도 페미니즘 운동에 동참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던 바로 그 왓슨이, 영화 속 캐릭터 벨에 대해 흘린 단서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벨의 의상인 코르셋을 입지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벨을 발명가로 만들 겁니다.”

코르셋을 입지 않은 발명가 벨, 왓슨의 언급대로라면 이번 리메이크 영화 속 벨은 1991년 처음 개봉된 애니메이션 영화 <미녀와 야수>에서 시나리오를 맡았던 린다 울버턴이 묘사하고 싶었던 벨일 수 있겠다 싶었다. 울버턴, 그녀가 그리고 싶었던 벨을 26년 만에, 영화 스크린으로 만날 수도 있겠구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기대는 한숨으로 바뀌었다. <미녀와 야수> 리메이크 영화는 여전히 전통적인 디즈니 공주 서사를 따랐다. 지도를 펼치고 발명을 하는 벨의 모습은 1991년 작 애니메이션 영화 속 벨보다 진취적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그런 벨을 보고 ‘페미니즘’을 운운하는 건 무리겠다 싶다. 일단 벨이 왕자를 만나 신분이 상승되는 여성이라는 점은 변함없는 사실이었으니까. 디즈니식 페미니즘의 한계다.

※우리에겐 <겨울왕국>의 엘사와 <모아나>의 모아나가 있다. <미녀와 야수>의 벨과 <인어공주>의 아리엘이 독립적이고 강한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하곤 하는데, 엘사와 모아나를 생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말이다. 지금 당장 가까운 영화관에 가서 <미녀와 야수> 리메이크 버전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래서 더 이상의 <미녀와 야수> 리메이크 영화 이야기는 생략.



3. 그래도 벨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면, 분명한 건 디즈니 공주님들의 변화는 벨로 시작됐고, 그 뒤에는 디즈니 최초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인 린다 울버턴이 있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후반 디즈니 영화 부문 수장이었던 제프리 카첸버그는 울버턴에게 <미녀와 야수> 시나리오 작업을 맡겼다. 당시 울버턴은 디즈니에서 일하는 단 한 명의 여성 시나리오 작가였다.

울버턴이 최초에 그렸던 벨은, 미지의 세상을 모험하길 원하는 책벌레이자 호기심 많은 발명가였다. 또 야수와의 말싸움에서 한 마디도 지지 않는다. 왕자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그러나 울버턴이 쓴 시나리오는 얼마 못 가 충격적일 정도로 퇴보적인 수정을 겪었다.

“울버턴은 벨이 지도를 펼친 뒤 자기가 가보고 싶은 곳에 핀을 꽂는 장면을 넣었다. 그런데 스토리보드 제작 단계에서 이 장면은 벨이 부엌에서 케이크 장식을 하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울버턴은 항의했고, 제작진은 벨이 책에 메모를 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2016년 5월, 타임의 일라이저 버먼이 쓴 글)



4. ‘이상한 여성’이라는 비아냥을 받아도 꿋꿋하게 로맨스 소설을 읽는 소녀인 벨을 ‘페미니스트의 혁명’으로 보긴 어렵다. 하지만 디즈니 작가들이 썼던 예전 시나리오의 벨과 비교해 보면 이것은 분명 긍정적인 방향이란 걸 알 수 있다. 벨 이전의 디즈니 영화 속 공주님들은 대부분 잠들어 있거나, 언어 장애를 갖고 있거나, 불평 없이 집안일에만 몰두하니까. 벨은 작은 진보였다. 작은 진보라도 진보는 진보다.



5. 그런 점에서 울버턴은 작은 변화가 갖는 힘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울버턴은 지난해 5월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여성을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역할로 묘사하면 젊은 세대에겐 그게 당연한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벨이 없었다면, 디즈니는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잠만 자던 오로라에서 <메리다와 마법의 숲>의 모험심 강한 메리다, <겨울왕국>의 대담한 엘사로 바로 옮겨가기 어려웠을 거다. 


울버턴은 지난해 EW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한 번에 일으킬 수 있는 변화에는 한계가 있다. 벨 이전의 디즈니 공주들을 보라. 벨은 독립적이고 개방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독서하기, 야외 탐험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걸 만드는 건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벨의 대사 한 줄 한 줄이 다 전쟁이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디즈니 공주님들이 소녀들의 마음을 훔칠 적에 나타난, 벨. 벨이 전형적인 디즈니 공주 이미지를 탈피한 여성 캐릭터는 아니지만, 울버턴의 작은 한 걸음이 바꾼 디즈니 공주의 역사. 그건 그가 이뤄낸 꽤 달콤한 승리가 아닐까.





헤럴드의 콘텐츠 벤처, HOOC이 첫번째 프로젝트 <인스파이어ㆍINSPIRE>를 시작합니다. 영어로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키다’라는 뜻의 인스파이어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에게 영감을 전달하고자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자극과 영감을 갈망하는 이들이라면, 인스파이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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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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