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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작정 자전거 국토종주] 6. 야간 라이딩 하다가 멧돼지 만나 봤나?
[HOOC=정진영 기자] 11월 15일. 숙소에서 나오자 봄꽃인 산철쭉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철을 모르고 피어난 꽃이 반가워 자세히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무릎 슬개골이 아파왔다. 엉덩이의 통증은 익숙해져 별 문제가 없었지만, 무릎 슬개골 부위의 통증은 차원이 다르다. 일단 페달을 밟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니 말이다. 준비 없이 무작정 자전거 국토종주를 떠난 대가였다. 후회를 하기에는 국토종주의 종착지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기자는 숙소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약국에서 관절염약을 구입해 복용한 뒤, 국토종주 코스에 오르기 위해 지난 밤에 도착했던 강정고령보로 다시 향했다. 


밤에는 조명으로 화려했던 강정고령보의 아침은 수수했다. 이날 목적지는 ‘창녕함안보’ 인증센터와 가까운 경남 창녕군 남지읍이었다. 남지읍은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와 가까운데다 숙소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라이더들의 주된 숙박지 중 하나이다. 문제는 이날 달려야 할 코스의 마지막 구간인 합천창녕보와 창녕함안보 사이의 구간이었다. 이 구간은 국토종주 코스 중에서도 이화령과 더불어 최악의 난이도로 유명하며, 또한 가장 긴(55㎞) 구간이기도 하다. 야간 라이딩을 또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대구 시내 5번국도 옆 자전거 도로 위에서.

‘달성보’ 인증센터로 향하던 중 지도를 살펴보니, 코스에서 잠시 벗어나 5번국도를 타면 조금 더 빨리 달성보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자는 야간 라이딩을 조금이라도 줄일 생각으로 5번국도를 탔다. 그러나 이 선택은 악수가 됐다. 국도 변에도 자전거 도로가 조성돼 있었지만, 노면 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오가는 행인들이 많아 제대로 속도를 낼 수 없었다. 원래 코스의 길이가 5번국도를 타는 코스보다 길었지만, 페달을 밟기에는 훨씬 수월했을 것이란 후회감이 밀려 들었다. 기대했던 시간 단축도 거의 없었다.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는 기존 자전거 도로와 비교하면 고속도로와 다름 없는 수준이다. 직접 경험해 보니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는 안전하고 빠르게 자전거 여행을 즐기며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인프라였다. 당초 기자는 자전거 국토종주를 시작하며 고발성 취재거리를 찾으려고 시도했었다. 그러나 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오히려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는 정말 잘 만든 인프라라는 생각이 더 커져 갔다.

'달성보' 인증센터 내부에 붙어있던 우회로 지도.

‘달성보’ 인증센터 내부에는 ‘합천창녕보’ 인증센터로 조금 더 빨리 이동할 수 있는 우회로 안내 지도가 붙어있었다. 야간 라이딩을 줄일 방법에 대해 골몰하던 기자는 5번국도에 이어 우회로의 유혹에도 빠져들었다. 우회로 지도 아래에는 ‘안전상 정식 종주길을 권유 드립니다’라는 완곡한 표현의 경고문이 붙어있었다. 기자는 경고문을 무시한 채 빠른 시간 안에 합천창녕보에 닿는 상상을 하며 기분 좋게 페달을 밟았다. 그러나 유혹에 빠져든 대가는 컸다.


국토종주 코스를 따라 합천창녕보로 향하다 보면 중간에 구지ㆍ대리와 도동서원 사이의 갈림길과 만나게 된다. 국토종주 코스는 도동서원 방향으로, 우회로는 구지ㆍ대리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 기자는 우회로 지도에 따라 구지ㆍ대리 방향으로 이동했다. 문제는 우회로 지도가 요약이 많이 된 지도였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이동한 듯 싶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방향을 잃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창녕군에 진입했지만, 아무리 주위를 살펴봐도 국토종주 코스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낙동강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지도를 제대로 살피고 한참 동안 페달을 밟은 끝에, 겨우 국토종주 코스임을 알리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합천창녕보’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시간을 단축시키려던 시도는 실패하고, 오히려 삭막한 길에서 쓸데 없이 많은 시간을 소모하고 말았다. 방향을 제대로 찾을 자신이 없다면 원래 코스대로 이동하는 것이 속편하고 안전하다. 우회로 지도에 붙어 있던 경고문을 무시했던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합천창녕보에 위치한 편의점에서 물과 간식거리 몇 가지를 보급한 뒤 이 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남지읍내로 향했다. 남지읍내를 경유하는 ‘합천창녕보’ 인증센터와 ‘창녕함안보’ 인증센터 사이의 코스는 난코스로 유명하지만, 기자는 이미 며칠 째 야간 라이딩을 경험한 터라 별다른 걱정 없이 페달을 밟았다. 이 선택 때문에 기자는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둠 속에 잠긴 끝 없는 길, 이화령 빰치는 급경사의 연속, 사실상 MTB 코스와 다름없는 임도 등 온갖 난관과 더불어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아찔한 경험까지 하게 됐다.

이 구간의 초입은 무난한 편이다. 해가 거의 저물 무렵에 합천에 진입한 기자는 매일 저녁마다 경험해 익숙한 어둠을 뚫고 의령에 도달했다. 이때까진 기자는 자신만만해 그저 열심히 페달을 밟으면 목적지에 무사히 닿을 줄 알았다.


본격적인 시련은 구간 중반 이후부터 찾아왔다. 이 구간은 중반 이후부터 급경사로 기자를 괴롭혔다. 라이더는 커녕 단 한 대의 차량도 다니지 않았던 이 구간에선, 바람 소리와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기자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어디선가 들리는 사람 비명소리를 닮은 고라니 울음소리는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하늘에선 수많은 별들이 빛났지만, 도저히 감상할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전조등에 비친 옹벽에 새겨진 수많은 욕설들은 이 구간의 악명을 곳곳에서 증명해주고 있었다. 날이 저물어 기온이 많이 떨어졌는데도,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흘렀다. 기자는 국토종주에 나선 후 처음으로 야간 라이딩을 깊게 후회했다. 

오르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나온 고개보다 더욱 난이도가 높은 곳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임도였다. 밤에 산을 넘어가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MTB에나 어울리는 비포장도로 수준의 길이 한참동안 이어졌다. 기자는 전조등 하나에 의지해 ‘끌바’를 동반한 강제 야간산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 모를 날짐승들이 어둠 속에서 날개를 퍼덕이며 내는 소리는 공포영화의 효과음향 같았다.


기자는 길었던 임도 코스를 벗어나 평지로 내려온 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기자는 국토종주 중 가장 큰 시련을 인적 없고 조명도 제대로 비추지 않는 농로 위에서 만났다. 자전거 전조등 불빛이 약 20m 앞에 있는 멧돼지를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전날에는 뱀을 만났는데 이번에는 멧돼지라니. 순간 기자는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길 위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멧돼지를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물러설 곳도 없고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었던 기자는 그 상태로 얼마 동안 멧돼지와 대치했다. 그 시간이 정말 억겁처럼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멧돼지가 먼저 물러났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기자와 대치했던 멧돼지는 농로 바로 옆의 추수가 끝난 논으로 뛰어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기자는 멧돼지가 사라진 후 한참 동안 시간이 흐른 뒤 짜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전속력으로 페달을 밟았다. 짧지만 강렬한 기억을 남긴 순간이었다. 이 구간은 결코 혼자서 야간 라이딩을 하면 안 되는 구간이란 것을 알리기 위해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기자가 직접 만난 멧돼지의 사진은 아니지만, 생김새는 이와 가까웠다. [사진 제공=Pixabay]

농로를 빠져나오자 먼 곳에서 빛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불빛은 기자가 오늘 숙박을 하려고 했던 남지읍내의 불빛이었다. 남지읍에는 모텔이 많아 쉽게 숙소를 잡을 수 있었다. 코스가 코스인 까닭에 이곳에선 자전거 여행객들이 많이 묵는 터라, 이 지역의 모텔은 자전거 거치대를 비롯해 라이더들을 위한 편의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기자는 멧돼지를 보고 놀란 가슴을 소주로 달래며 잠을 청했다. 이제 하루만 더 페달을 밟으면 국토종주도 끝이라는 생각에 잠이 쉽게 들지 않았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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