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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작정 자전거 국토종주] 5. 내가 자전거인가 자전거가 나인가
[HOOC=정진영 기자] 자전거 국토종주 시작 후 닷새째를 맞은 기자의 몸 상태는 배터리에 비유해 설명하면 적당할 것 같다.

첫째 날에 완충 상태였다가 방전된 뒤, 둘째 날에는 80% 충전됐다가 방전되고, 셋째 날에는 70% 충전됐다가 방전된 뒤, 넷째 날에는 60% 충전됐다가 방전되는…….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매일 체력의 총량이 떨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주행거리는 오히려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국토종주 시작 후 최하의 체력 상태였던 이 날 기자는 주행거리 100㎞를 훌쩍 넘겼다. 그것도 MTB가 아닌 미니벨로로. 심지어 평지에서 페달을 밟을 힘이 모자라 균형을 못 잡아서 길에서 자전거와 함께 구르는 일까지 벌어졌는데도 말이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하다가 기자는 관성 때문이 아닌가 하는 결론에 이르렀다. 몸과 정신이 자전거 페달을 밟는 일에 익숙해지고 목표가 점점 가까워지니, 이젠 멈출 수 없게 돼 버린 것이다.

관성은 우리의 삶에 항상 존재한다. 특히 일적인 면에서 그런 부분이 두드러진다. 일도 처음 배울 때에 많이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니 말이다. 익숙해진 일을 더욱 갈고 닦아 전문가로 거듭난다면, 그 관성은 좋은 관성일 것이다. 하지만 익숙함에 흠뻑 젖어 게을러지면, 그 관성은 나쁜 관성일 것이다. 기자는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자신이 좋은 관성과 나쁜 관성 중 어떤 관성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가 고민해봤다. 부끄럽게도 후자인 것 같았다. 


11월 14일. 이날 기자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오전 7시에 숙소를 출발했다. 기자는 여행 4일차까진 늦잠을 자고 오전 10시쯤에 출발했는데, 이렇게 여유 있게 출발하다보니 야간 라이딩을 피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햇살이 떠오르며 낙동강 수면 위에 자욱하게 깔려있던 안개를 걷어냈다. 기자가 머물렀던 경천대 부근 숙소에서 ‘상주보’ 인증센터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평소보다 일찍 수첩에 인증도장을 찍을 수 있어 즐거웠지만, 다음 목적지인 ‘낙단보’ 인증센터로 향하는 구간은 이화령 이상으로 인내를 시험하게 만드는 구간이었다. 노면 상태가 고르지 않은데다, 끊임없이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상 비포장도로와 다름 없는 구간이 많아, 기자는 타이어에 펑크가 날까봐 내리막길에서도 ‘끌바’를 해야만 했다. 이 구간의 중간 쯤에 위치한 옹벽에는 기자보다 앞서 지나간 이들이 남긴 수많은 낙서가 새겨져 있다. “살려줘”. 기자의 심정을 정확하게 표현한 낙서였다.


‘자전거의 도시’를 자처하는 상주에는 코스 곳곳에 타이어 공기 주입기가 설치돼 있어 이채로웠다. 그러나 ‘자전거의 도시’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보급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자전거 국토종주 코스에서 수도권을 벗어나면 생기는 가장 큰 문제가 보급이다. 편의점은커녕 조그만 가게 하나와 만나는 일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전거 국토종주 중에는 항상 충분한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불편하지만 시골 가게에선 카드를 받는 곳이 거의 없다. 가능하다면 1000원권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게 편하다. 거스름돈도 충분하지 않은 가게도 많기 때문이다. 아침 식사를 하지 못한 기자는 코스 중간에 만난 작은 가게에서 간식거리를 구입한 뒤 바로 길을 떠났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니 의성군에 진입했다. ‘낙단보’ 인증센터는 상주와 의성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낙단보 주변에는 음식점들이 많았다. 기자는 지난 밤 시간이 늦어 낙단보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일정만 잘 맞춘다면 낙단보에서 숙박을 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듯싶었다.

페달을 밟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구미시로 진입했다. 낙단보는 상주, 의성, 구미의 경계와 가까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다음 목적지인 ‘구미보’ 인증 센터까지 이어지는 구간은 평이한 길이다. ‘구미보’ 인증센터 근처에는 한국수자원공사가 운영하는 구미보사업소가 있는데, 그 건물에 귀하신 몸인 편의점이 있다. 그러나 기자가 도착한 시간에는 편의점이 문을 닫은 상황이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가까운 곳에 편의점을 겸한 펜션이 보여 그곳에서 간단히 컵라면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진통제를 복용하며 자전거의 페달을 밟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기자는 혼비백산했다. 바로 앞에 뱀이 보였기 때문이다. 간신히 자전거의 균형을 잡은 기자는 뱀을 피해 다시 페달을 밟았다. 피곤했던 몸과 정신이 순식간에 깨어났다.

코스 그 자체의 난이도 때문에 힘든 ‘새재자전거길’과는 달리 ‘낙동강종주자전거길’은 고독해서 힘든 구간이다. 늦가을이다 보니 자전거 국토종주를 하는 라이더들도 거의 없었고, 구간이 매우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가 길에서 목격한 라이더의 수는 5명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목격한 라이더도 모두 동네 주민인 듯했다. 극한의 고독을 느껴보고 싶다면 늦가을에 홀로 낙동강 자전거 종주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고요한 공간에서 벗어나 수많은 화물차들이 도로를 오가는 구미산업단지 주변을 코스를 벗어나면, 다음 목적지인 ‘칠곡보’ 인증센터가 위치한 칠곡군이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기온은 확연히 따뜻해졌다. 높아진 기온은 식물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낙동강 주변에는 서울에선 이미 한참 전에 진 여름꽃인 패랭이꽃, 달맞이꽃이 아직도 많이 피어있었다. 가을꽃인 코스모스와 백일홍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철없는 꽃들을 다시 보는 일은 즐거웠다. 낙동강변에선 많은 사람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구미보’ 인증센터와 ‘칠곡보’ 인증센터 사이의 거리는 35㎞이다. 다른 코스와는 달리 ‘낙동강종주자전거길’은 인증센터의 위치가 매우 띄엄띄엄 떨어져 있다. 하류 쪽에는 인증센터 구간 사이의 거리가 50㎞ 이상인 곳도 있을 정도이다. 인증센터 주변에 가게와 숙소가 없는 곳도 허다하다. 오래 달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계획을 세워 달려야 하는 이유이다. ‘칠곡보’ 인증센터와 다음 목적지인 ‘강정고령보’ 인증센터 사이의 거리는 36㎞였다.

마침 해가 기울고 있어서 미니벨로로는 야간 라이딩을 피할 수 없는 긴 거리였다. 하지만 이 코스를 오늘 소화해야 내일 모레 최종 목적지인 ‘낙동강하굿둑’ 인증센터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기자는 ‘강정고령보’ 인증센터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칠곡보’ 인증센터 근처에는 ‘낙동강종주자전거길’에선 귀한 편의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기자는 물과 간식을 보급한 뒤 바로 ‘강정고령보’ 인증센터로 출발했다.


칠곡군 내 왜관읍은 나름 번화가이다. 야간 라이딩을 하더라도, 자동차들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에 덜 외로운 구간이다. 하지만 왜관읍을 지나면 이런 구간은 사라진다. ‘낙동강종주자전거길’ 구간의 대부분은 강을 따라 이어지는데다, 조명도 드무니 말이다. 이런 코스에서 야간 라이딩을 하다보면 먼 곳의 조명조차 그리워진다.

한참 동안 페달을 밟은 끝에 ‘강정고령보’가 위치한 대구에 도착했다. 어둠 속에선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최선을 다해 빨리 어둠 속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저 멀리서 불빛이 보였다. 강과 강 사이를 잇는 불빛. 표지판이 없어도 알 수 있다. 저 불빛은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대구 강정고령보의 불빛이었다. 다리에서 없던 힘이 솟았다.


‘강정고령보’ 인증센터에 도착해 수첩에 인증도장을 찍은 뒤 숙소를 찾아봤다. 강정고령보는 번화한 관광지였지만, 음식점만 많을 뿐 숙박업소가 없었다. 도착하기 전에 근처에 자전거 여행객을 위한 게스트하우스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 영업을 하지 않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숙소는 강정고령보에서 4㎞ 이상 떨어진 성서 쪽에 있었다. 이를 악문 채 다시 페달을 밟으며 성서로 향했다. 숙소는 무조건 코스와 가까운 곳에 잡아야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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