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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식물왕 정진영> 24. 그녀들의 고운자태, ‘기생초’ 전모로만 남았네
[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매 계절마다 피는 꽃은 그 계절의 색감을 읽을 수 있는 단서입니다. 봄에 피는 꽃들은 따사로운 햇살을 닮아 파스텔 톤으로 겨우내 묵은 세상을 물들이지만, 여름에 피는 꽃들은 강렬한 햇살을 닮은 원색으로 지난 계절의 흔적을 지우죠. 계절의 색감은 그 계절 햇살의 농도와 비례한다고 말해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는 7월이면 꽃들은 세상 구석구석을 선명한 원색으로 채웁니다. 그중 일부는 원색으로도 모자라 그와 대비를 이루는 색으로 치장해 오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잡죠. 매년 이맘때면 샛노란 꽃부리를 펼치고 그 내부를 밤색으로 치장하는 기생초는 강렬한 색의 대비로 여름 햇살을 이기는 꽃입니다.

서울시 행당동 살곶이다리 부근에서 촬영한 기생초. 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기생초는 초롱꽃목 국화과의 한해살이풀로 북아메리카 원산입니다. 본디 관상용으로 들여와 심어서 가꾸던 것이 바깥으로 퍼져 나가 널리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죠. 개망초, 루드베키아 등 북아메리카 원산 귀화 식물들이 대개 그러하듯 기생초 역시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그 생명력 덕분에 이방인인 기생초는 매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전국의 길가를 색으로 수놓는 친숙한 녀석이 됐습니다.

아리따운 기생초의 자태는 이름의 연원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기생초의 기생은 ‘기생(寄生)’이 아니라 ‘기생(妓生)’입니다. 세간에는 꽃의 모양이 조선 말 기생들이 바깥나들이를 갈 때 쓰던 전모(氈帽)를 닮아 기생초란 이름을 얻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치 화장으로 포인트를 준 듯 짙은 밤색으로 물든 꽃부리의 내부가 작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을 겁입니다. 사실 기생이란 말의 어감은 썩 좋은 편이 아닙니다. 하지만 반가의 부녀들이 전모를 사용한 예는 없으니 어여쁜 것이 죄라면 죄겠군요. 고운 자태는 온데간데없고 전모만 남은 옛 기생들은 이제 꽃으로 피어나 풍진 세상을 거쳐 사라진 자신들의 역사를 추억하고 있습니다.

한번 같이 상상력을 발휘해 보시죠. 황진이, 이매창, 일지홍 등은 역사에서 이름을 전하는 명기(名妓)들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당대의 사대부들이 탐할 순 있어도 소유할 순 없는 존재들이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명기들 역시 사대부들과 마음을 나눌 순 있어도 온전히 그들의 영역에 속할 순 없었겠죠. 가깝고도 먼, 멀고도 가까운 사이 아닌가요? 이 같은 사이를 요즘에 빗대면 ‘사랑보다 먼, 우정보다는 가까운’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생초의 꽃말은 ‘다정다감한 그대의 마음’, ‘추억’, ‘간절한 기쁨’입니다. 상상력을 발휘해보니 기생초의 꽃말이 문득 아련하게 느껴집니다. 신경림 시인의 절창 중 하나인 ‘가난한 사랑 노래’는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노래합니다. 반상의 법도가 지엄한 세상이지만 기생도 여자인데 어찌 사랑을 몰랐겠습니까. 자신보다 28살 연상인 시인 유희경(1545~1636)을 깊이 사랑했던 이매창의 연심(戀心)은 시조 한 수로 남아 운명적인 사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울며 잡고 이별한 임/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나를 생각하는가/천 리에 외로운 꿈만/오락가락 하노라”

123@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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